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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지도 않는 오늘의 운세를 매일 읽는 이유

· 약 5분
Wonkook Lee
Product Engineer · Former Industrial Designer
믿지도 않는 오늘의 운세를 매일 읽는 이유

매일 아침 8시쯤 출근합니다. 이 시간에는 회사 사내 라운지가 아직 열지 않아서 출근길에 거의 항상 바나프레소에 들러 커피를 삽니다.

컵에는 작은 ‘오늘의 운세’ 스티커가 붙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읽었을 텐데 어느 순간부터 커피를 받을 때마다 그 스티커를 확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커피 한 잔 사는 일에 운세 읽기가 슬그머니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운세를 특별히 믿는 편이 아닙니다. 좋은 운세가 나왔다고 그날의 행동이 달라지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매번 읽습니다. 이 스티커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면 조금 허전할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믿지도 않으면서 꽤 성실하게 챙겨 읽고 있는 셈입니다.


굳이 한 번씩 열어보는 것들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나니 비슷한 것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앱에서 눌러보는 랜덤 포인트나 손가락으로 긁는 행운복권이 그렇습니다. 포춘쿠키 속 종이도 있고 하루에 한 장 열어보는 오늘의 카드나 오늘의 질문도 있습니다.

포인트는 실제로 쓸 수 있는 돈이고 질문 카드는 생각할 거리를 준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도 열기 전에는 내용이 보이지 않고 확인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는다는 점이 닮았습니다. 그 앱이나 가게를 이용하는 본래 용건과는 별개로 한 번쯤 들여다보게 되는 작은 요소들입니다.

커피를 사러 갔는데 운세까지 읽는 제 아침도 여기에 들어갑니다.

왜 굳이 확인할까요. 맞는 말을 해줄 거라는 기대가 없다면 그냥 지나쳐도 될 텐데 말입니다. 생각해보면 아직 읽지 않은 스티커 앞에서는 아주 짧게나마 궁금해지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무슨 말이 적혀 있을지.

그 몇 초가 궁금해서 소비자심리 연구를 찾아봤습니다.


오늘은 무엇이 나올까

관련 연구를 찾아보니 두 논문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Hsee와 Ruan은 2016년 네 개의 실험을 통해 사람들이 별다른 이득이 없어도 불확실한 결과를 굳이 확인하는 현상을 살펴봤습니다. 참가자들은 확인해봐야 딱히 얻을 것이 없는데도 결과를 알 수 없는 대상을 확인했습니다. 심지어 결과가 전기 충격처럼 그다지 반갑지 않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그랬습니다.

연구진은 결과의 득실과 별개로 불확실성을 해소하려는 욕구가 있다고 보고 이를 판도라 효과(Pandora effect)라고 부릅니다. (논문)

읽으면서 눈에 들어온 건 ‘얻을 것이 없어도 확인한다’는 부분이었습니다.

저는 오늘의 운세가 맞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읽는다고 딱히 얻는 것도 없습니다. 그래도 아직 읽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아주 작은 궁금증이 생깁니다.

컵에 매일 똑같은 인사말이 적혀 있다고 상상해봅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라는 문장을 처음 몇 번은 읽겠지만 곧 눈이 지나칠 것 같습니다. 이미 무슨 말인지 알고 있으니 다시 확인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의 운세는 다릅니다. 오늘 어떤 내용이 붙어 있을지 아직 모릅니다.

전기 충격을 앞에 둔 실험과 커피 컵에 적힌 운세는 꽤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래도 '얻을 것이 없어도 확인한다'는 결과를 읽고 나니 믿지도 않는 운세를 왜 굳이 읽어보는지에 조금 가까이 다가간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보고 난 뒤에는 무엇이 남을까요.

운세를 읽었다고 커피 양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다음 잔을 할인받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저는 이 몇 초를 은근히 재미있어하고 있습니다.

Ruan, Hsee와 Lu의 2018년 논문은 여기서 한 발 더 갑니다. 정보를 처음부터 전부 보여주는 것과 일부를 잠깐 감췄다가 보여주는 것을 비교했습니다.

일곱 개의 연구에서는 정보를 처음부터 보여주는 것보다 잠깐 궁금하게 만들었다가 보여줬을 때 사람들이 그 경험을 더 즐겁게 평가했습니다. 논문에서는 이를 쾌락적 경험(hedonic experience)으로 측정합니다. 광고에 같은 구조를 적용한 실험에서는 광고에 대한 태도와 제품을 사용해보고 싶은 의향에도 차이가 나타났습니다. (논문)

연구진은 잠깐의 불확실성이 호기심을 만들고 그것이 풀리는 과정에서 즐거움이 생길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한 가지가 더 눈에 들어왔습니다.

사람들에게 직접 고르게 했을 때는 정보를 처음부터 전부 보여주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더 즐거웠던 방식을 정작 스스로는 고르지 않은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이 순서도 제가 일부러 만든 것은 아닙니다. 커피를 사러 가면서 ‘오늘은 몇 초쯤 궁금해하다가 운세를 읽어야지’라고 계획할 일은 없습니다.

그냥 붙어 있었고 저는 어느새 읽고 있었습니다.

퀴즈와 광고를 다룬 결과이므로 커피 컵에도 같은 효과가 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제 아침의 몇 초를 돌아보게 하는 단서는 됐습니다.


커피를 받는 순간의 몇 초

다시 제 컵으로 돌아오면 바나프레소는 커피를 받는 순간에 몇 초짜리 궁금증 하나를 끼워 넣었습니다.

대단한 혜택은 없습니다. 문장 몇 줄을 읽으면 끝입니다.

제품을 만드는 엔지니어로서 보면 이 부분에 눈이 갑니다. 커피를 주문하고 받는 데 운세 스티커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없어도 커피는 잘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바나프레소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 길게 쓰고 있는 소재는 커피 맛도 가격도 아니고 컵에 붙은 작은 종이입니다.

이 정도의 경험도 브랜드를 기억하는 한 조각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적어도 제게 바나프레소는 아침에 커피를 사면서 운세도 한 번 읽는 곳이 되었습니다.

사내 라운지가 아직 열지 않았다는 이유로 시작한 습관에 예상하지 못한 몇 초짜리 재미가 붙었습니다.

내일도 아마 출근길에 같은 바나프레소에 들를 것 같습니다. 커피를 받고 나면 별생각 없이 스티커부터 확인할 것입니다.

왜 읽는지 논문까지 찾아봤다고 그 몇 초가 달라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좋은 운세였으면 좋겠습니다.

바나프레소 아이스 아메리카노 컵에 붙은 오늘의 운세 스티커

오늘은 진심이 전달되는 날이랍니다


References

좋은 사람들과 재미있는 일을 하며 열정적이고 즐겁게 살고 싶은 개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