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은 창작의 즐거움

예전에 만들었던 수상작 세 개를 다시 꺼냈습니다. 점자를 읽어 음성으로 전달하는 SNAIL, 스노보드 위에 레이저 패턴을 만드는 STYLIGHT, 집의 모서리를 활용하는 식물 재배기 Corner Farm입니다. 한동안 포트폴리오의 이미지로 남아 있던 작업들입니다.

Red Dot Design Award 2011, Design Concept 부문 시상식
이번에는 ChatGPT와 Claude를 활용해 세 작업을 웹으로 옮겼습니다. 예전 모델링 파일과 렌더링 이미지를 바탕으로 브라우저에서 제품을 돌려 보거나 내부를 열어 볼 수 있게 하고, 사용하는 장면에도 움직임을 더했습니다.
처음 화면을 띄우는 데 필요한 수고는 확실히 줄었습니다. 그 덕분에 작업의 범위도 조금씩 넓어졌습니다. 모델 하나를 웹에 올리고 나면 내부가 궁금해졌고,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되면 실제로 쓰는 장면까지 보고 싶어졌습니다. 예전 같으면 구현에 들 시간을 생각해 접었을 시도도 이번에는 화면에 올려놓고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세 작업에 어울리는 설명 방식은 서로 달랐습니다.
작업마다 다른 설명 방식
SNAIL에서는 손에 쥐는 형태와 내부 구조를 보여주는 데 집중했습니다. 외장을 열고 부품의 배치를 살펴보며 점자를 읽어 소리로 전달한다는 구상을 설명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손가락이 들어갈 공간은 충분한지, 배터리와 센서는 어디에 놓고 어떻게 연결할지 같은 질문이 생겼습니다. 겉모습만 볼 때는 지나쳤던 부분들입니다. 예전 모델을 다시 다루다 보니 당시의 설계도 되짚어 보게 됐습니다.

SNAIL 화면. 본체를 반투명하게 비춰 바퀴 안쪽 부품과 베어링을 보여줍니다.
STYLIGHT는 움직임이 있어야 설명되는 제품이었습니다. 정지된 이미지에서도 빛의 모양은 보이지만, 어두운 설면 위에서 보드가 방향을 바꿀 때 그 빛이 어떻게 느껴지는지는 전달하기 어려웠습니다. 라이더가 내려가는 장면을 만들고 보드 위의 패턴을 움직이자, 이 디자인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조금 더 직접적으로 드러났습니다.

STYLIGHT 컨셉 화면. 양쪽 바인딩에서 나온 레이저 물결이 보드 위로 흐릅니다.
Corner Farm은 집 안에서 생활하는 작은 게임으로 커졌습니다. 캐릭터를 움직여 제품을 한 단씩 쌓고 각 단에 심을 채소를 고릅니다. 식물이 자라면 수확하고, 연결된 세 방을 오가다가 책상 앞에 앉아 쉬기도 합니다. 모서리에 놓이는 모듈형 재배기라는 설명을 읽는 대신, 직접 설치하면서 그 구성을 알아가도록 했습니다.

Corner Farm 플레이 화면. 세 방을 오가며 제품을 쌓고 채소를 키웁니다.
같은 3D 모델이라도 방문자가 무엇을 하게 하느냐에 따라 전달되는 내용이 달랐습니다. 제품을 자유롭게 회전시키는 기능만으로 모든 디자인이 잘 설명되지는 않았습니다. 어떤 작업은 내부 구조를 드러내는 편이 낫고, 어떤 작업은 사용하는 순간을 보여주는 편이 나았습니다. 웹으로 옮기면서 각 디자인에 맞는 설명 방식도 다시 고르게 됐습니다.
움직여 보고 나서야 보인 문제
처음부터 의도대로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Corner Farm에서는 흰색 외장과 파란색 내부가 원본과 다른 색으로 나오기도 했고, 캐릭터가 바로 앞에서 제품의 설치 장면을 가리기도 했습니다. 안내를 넣었더니 화면 구석에 긴 대화창이 생겼습니다. 이를 캐릭터 근처의 짧은 말풍선으로 옮기고, 필요할 때 눌러 내용을 확인하도록 여러 번 고쳤습니다.
직접 조작해 보니 정지 화면에서는 알아채기 어려운 문제도 보였습니다. 화분이 동선을 막았고, 앞쪽 방의 벽이 캐릭터가 있는 방을 가렸습니다. 식물이 너무 느리게 자라서 수정했더니 이번에는 너무 빨리 자랐습니다. 한글 입력 상태에서도 이동 키가 동작해야 했습니다. 설치 애니메이션을 잘 만들어도 제품을 쌓는 순간 화면이 버벅이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런 문제는 화면으로 확인한 뒤에야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막연하게 완성도를 높여 달라고 하던 요청이 “이 벽은 없애지 말고 캐릭터를 가릴 때만 반투명하게”, “설치가 끝나면 다음 안내를 보여주되 동작까지 자동으로 하지는 않게” 같은 문장으로 바뀌었습니다. 구현이 빨라진 덕분에 요구사항도 더 일찍 구체화됐습니다. 만들어 보는 과정 자체가 기획의 일부가 된 셈입니다.
구현에서 판단으로
화면을 구현하는 데 쓰던 시간의 일부가 결과를 살펴보고 판단하는 쪽으로 옮겨갔습니다. 무엇을 원본대로 유지하고 어디까지 새로 해석할지, 어떤 조작이 제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지 계속 판단해야 했습니다. 결과가 빨리 나올수록 그런 결정도 더 자주 필요했습니다.
그렇다고 코드를 이해할 필요가 줄었다고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기능을 더하기는 쉬워졌지만, 서로 다른 기능이 부딪히거나 성능이 나빠졌을 때는 구조를 살펴야 했습니다. 원하는 모습을 설명하는 능력과 실제로 안정적으로 동작하는지 확인하는 능력이 함께 필요했습니다. 예전에 디자인을 하며 익힌 감각과 이후 개발을 하며 쌓은 경험을 한 작업 안에서 함께 쓰게 됐습니다.
화면으로 보여준 것과 실제로 검증한 것을 구분하는 일도 필요했습니다. 내부 부품을 세밀하게 배치하면 훨씬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화면 안에서 잘 들어맞는다고 실제로 제작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Corner Farm에서 식물이 자라고 수확되는 장면 역시 제품의 사용 흐름을 설명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시각화가 정교해질수록 어디까지 확인한 내용인지 더 정확히 알고 있어야 했습니다.
다시 쓰인 원본 파일
오래된 작업 파일도 다르게 보였습니다. 당시에는 결과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원본이었지만, 지금은 새로운 경험을 만드는 재료가 됐습니다. 형태와 비례를 처음부터 설명할 필요가 없었고, 원본 이미지가 있으니 AI가 내놓은 결과에서 무엇이 달라졌는지 비교할 수 있었습니다. 도구가 좋아졌을 때 다시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완성된 이미지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미지를 만들며 남겨 둔 파일과 당시의 판단도 함께 쓰였습니다.
멈추기 어려웠던 이유
수정이 쉬워지면서 멈추기는 오히려 어려워졌습니다. 방을 하나 더 만들거나 고양이의 행동을 추가할 수 있고, 재질도 다시 바꿔 볼 수 있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날수록 작업의 목적을 놓치기도 쉬웠습니다. 이번에는 방문자가 제품을 이해하고 직접 다뤄 볼 수 있는지를 기준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무언가를 더하는 일만큼 이미 넣은 것을 덜어내고 정리하는 데도 시간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멈추기 어려웠던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무언가를 만드는 일 자체에 푹 빠졌습니다. 화면을 직접 움직여 보고, 마음에 걸리는 부분을 고치고, 다시 확인하다 보면 어느새 밤이 깊어 있었습니다. 조금만 더 만져 보면 제가 원하던 모습에 가까워질 것 같아 쉽게 손을 놓지 못했습니다. 머릿속에 있는 것을 눈앞에 꺼내 놓고, 마음에 들 때까지 표현을 다듬어 나가는 과정이 즐거웠습니다.


우리 집 고양이와 Corner Farm 속 고양이. 싱크로율 100%로 재현했습니다.
ChatGPT와 Claude가 구현에 드는 수고를 줄여 준 덕분에 그런 시도를 훨씬 가볍게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부터 생각했을 아이디어를 일단 만들어 보고, 결과를 보며 다음에 해볼 것을 떠올렸습니다. 그렇게 하나씩 손을 대다 보니 밤늦게까지 만드는 재미에 빠져 있었습니다.
사진 대신 열어 보는 작업

블로그의 Playground 페이지
세 작업은 이제 블로그에서 직접 열어 볼 수 있습니다. 오래된 디자인의 수상 이력은 그대로지만, 방문자가 그 작업을 만나는 방식은 달라졌습니다. 사진을 넘겨 보는 대신 외장을 열어 보고, 움직이는 빛을 보고, 집 한쪽에 제품을 쌓아 볼 수 있게 됐습니다.
예전에는 한 장의 이미지에 담아 설명해야 했던 것들을 이제는 움직여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달라진 작업을 보여줄 수 있어 반갑습니다. 무엇보다 그걸 만드는 시간이 참 즐거웠습니다.

